내가 쓰는 만년필
시작
어느 때인가 Graf von Faber-Castel에서 나온 나무로 만들어진 만년필을 보고 참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편하게 살만한 가격은 아니어서 그냥 머리 한 켠에 담아두기만 했었는데, 그러다 누나가 생일 선물을 보내준다고 해서 혹시 그라폰파버카스텔의 만년필을 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누나가 사준 것은 그냥 _파버카스텔_의 만년필이었으나 그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기에 열심히 쓰려고 했다.
쓰려고 했다는 것은, 잘 쓸 수는 없었다는 거다. 잉크를 채우는 불편함 같은 것은 상관없었으나, 만년필을 쓰려고만 하면 펜의 잉크가 말라서 힘껏 흔들어 주거나 잉크가 든 튜브의 밸브를 살짝 돌려서 펜촉 쪽으로 잉크를 흘려주거나, 물에 한 번 펜촉을 적셔줘야 했다. 회의하면서 펜을 꺼내면 막상 안나오는 일이 많아서 점점 덜쓰게 되었다.
새 펜
그러다 미니언을 좋아하는 아내의 친구에게서 저렴한 만년필을 얻게되었다. 가볍게 써봤는데, 의외로 적당히 잘 나왔다. 펜촉이 너무 거칠다는 느낌이 들기는 했지만 파버카스텔의 만년필처럼 잉크가 마르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좀 쓰다보니 좋은 만년필에 약간 욕심이 들었다. 그렇다고 아주 좋은 것은 필요없고… 그래서 아마존을 조금 뒤져보니 LAMY의 Ruthenium이라는 이름의 펜이 보였다.
라미는 플라스틱이 많아서 좀 망설였는데, 금속 계통인 듯하여 마음에 들어 Extra Fine 펜촉으로 주문했다. 그러고 얼마 뒤에 회사에서 경력직 입사기념으로 또 EF 펜촉의 라미 만년필을 선물해줬다. 이 녀석은 짙은 회색의 플라스틱인 대신에 내 이름을 영문으로 새겨줬다. 둘 다 잉크가 마르는 일 없이 잘 써져서 요새는 이 두녀석을 들고 다니며 주력으로 사용한다.
비교
위에서 부터 차례대로 파버카스텔의 만년필, 저렴한 미니언 만년필, 아마존에서 구입한 라미와 회사에서 준 라미이다. 미니언의 경우에는 잉크가 거의 닳았는데, 잉크 카트리지를 못 찾아서 그냥 썼기에 글자가 좀 끊긴 면이 있다. 파버카스텔과 미국 라미의 EF 펜촉은 내 기준에서는 충분히 가늘어서 글씨를 쓰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진 상에서는 파버카스텔이 더 굵어 보이는데, 잠깐 사이에 잉크가 말라서 또 물에 한 번 담궈서 그렇다. 계속해서 쓰는 중에는 오히려 좀더 가는 느낌이다.
내 생각에는 오히려 너무 가늘다 보니 펜이 마르는게 아닌가 싶은 정도여서, 집에 두고 가끔 스케치 연습할 때 사용한다. 가끔이다보니 매번 펜촉에 물을 뭍혀서 쓰게된다. 위 그림에서 보다시피 획이 상당히 날카롭고 가늘게 써진다.
라미는 둘 다 EF 펜촉임에도 굵기가 다르다. 회사에서 준 것은 아무래도 한국에 들어온 그대로일텐데, 더 굵다. 한글처럼 획이 끊기는 글씨체에는 좀더 가는게 맞을텐데 왜 더 굵게 들어오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 밖에는 크게 다른 것은 없다. 종이에 쓸 때도 만년필 특유의 사각사각하는 느낌 외에 거칠게 종이를 긁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사용
위에도 말했듯이 파버카스텔 만년필은 집에서 한 번씩 그림 연습 — 이라고 해봐야 한 달에 한 범도 잘 안그려서 실력은 도무지 늘지 않는다 — 할 때 쓰는 편이다. 다른 도구에 비해 더 편하거나 쓸만한 효과 같은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종이에 선을 그을 때의 그 느낌이 좋다.
라미는 펜 주머니에 담아 들고 다니면서 일상적인 필기에 사용한다. 주로 쓰는 것은 좀더 가는 촉의 라미이고, 플라스틱 라미에는 파란 잉크를 담아서 쓸 예정이다.
미니언 만년필은 지금은 쓰지 않는다. 종이 위에 선을 긋는 느낌이 썩 좋지는 않아서 손이 잘 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