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또는 1Q84년
최근 3권을 읽었다. 1, 2권을 읽은 것은 내가 군대에 있을 때였으니, 2권을 읽고 3권을 읽기까지 무려 6년 정도가 지났다. 그렇다보니 3권을 읽으면서 지금 어쩌다 이런 상황으로 온 것인지는 어느정도 생각이 났지만, 작은 내용까지 세세하게 생각이 나진 않았다. 3권을 너무 늦게 읽어서 아쉬운 점이랄까.
하루키의 미묘한 현실
처음 제목을 보고서는 이게 뭔가 했는데, 책을 조금만 읽고 일본어로 아홉까지만 셀 수 있으면 왜 저렇게 제목을 지었는지 이해가 된다. 그리고 심지어는 조금 노골적이라는 생각조차 들기도 한다.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은 노르웨이의 숲이었고, 애프터 다크처럼 늦은 밤부터 새벽녘의 도시 모습을 가감없이 묘사한 소설도 있긴하지만, 내가 하루키의 소설에게서 가장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묘하게 살짝 어긋나있는 현실의 묘사이다.
예를 들어,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주인공과 대척하고 있는, 악이 형상화된 존재는 양의 모습을 띄고 있다.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세상의 끝과 하드보일드원더랜드’에서는 주인공의 현실과 꿈이 번갈아 가며 진행되다가 어느순간 꿈과 현실이 맞닥뜨린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누군가 말했던 것처럼, 하루키의 소설에서는 “어느 평화로운 주말 이른 오후,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며 화창한 날씨를 느낄 때, 문득 누군가가 초인종을 누른다. 그래서 ‘이 시간에 누가 나를 찾지?’ 하는 의구심과 함께 문을 열어보면 염소의 머리를 한 누군가 문 앞에 서있는” 모습을 떠올릴 법한 장면이 종종 묘사되는 것이다.
완전히 다른 세계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은 꽤 노골적이고, 상당히 직선적이기도 하다. 심지어 주인공조차 이 세계가 현실의 그 세계 가 아님을 의식하고 있다. 하늘에는 두 개의 달이 떠서 독자에게도 그 사실을 끝없이 환기시키고, _리틀 피플_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나타나 무표정하게 기계적인 모습으로 나를 불안에 빠트릴만한 일들을 하나씩 하고는 사라진다.
이야기에 특별한 반전은 없고, 익숙하게 느껴질 법한 장면도 종종 나오긴하지만, 두엇의 주요 등장인물의 관점을 번갈아 취하면서 이야기를 이끌고 가면서 한 번 씩 주의가 환기되기 때문에 특별히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형식이 많은 부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소설이라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는 2권에서 끝났어도 충분히 괜찮을 법한 소설이라는 생각이다. 당시에 내가 들었던 소문은 원래 저자는 2권에서 끝내려 했는데, 독자들의 성화가 커서 3권을 써서 소설을 마무리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2권을 끝으로 소설을 열린 결말로 마무리 했어도 충분했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내 인식 상으로는 끝난 소설이었고, 그래서 한참동안 3권을 찾아보지 않았다.
로맨스? 모험담? 풍자?
서평을 보면 이 이야기를 일종의 로맨스 소설로 보는 시각도 많은 것 같은데, 2권까지만 놓고 보면 두 주인공의 애착에 대한 이야기가 좀 있긴 하지만, 로맨스이기보다 빅 브라더와 대응되는 리틀 피플과 그들의 손에 조종되는 (오움 진리교를 연상시키는) 종교 단체와 그 이상한 세계에서 벗어나는 모험담이 중심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하지만 3권에서 두 주인공의 서로에 대한 인식이 점점 깊어지면서 다른 이야기가 끼어들 틈이 너무 좁아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끝으로 갈 수록 더 호흡이 빨라지고, 마지막까지도 모든 의문을 해소해주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