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ftyThree에 대한 작은 생각
FiftyThree라는 회사를 알게된 것은 Paper라는 아이패드용 그림 앱을 통해서였다. 이 Paper라는 앱은 무료로 다운 받을 수 있고, 펜 하나를 이용할 수 있는데 추가적인 도구는 돈을 더 내면 구매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런 식을 Freemium 앱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어지간히 마음에 들어도 인앱 구매가 필요하면 그냥 지워버리는 경우가 많다. 차라리 처음부터 제 값 치르고 사는 것이 마음이 편해서이다. 하지만 이 앱은 내가 몇 번 써보다가 반해서 추가적인 도구들을 구매한 몇 안되는 아이패드용 응용프로그램 중의 하나이다.
어떻게 발전해 오고 있나.
지우개를 포함하여 펜, 볼펜, 연필, 아웃라이너, 붓 등은 처음부터 미리 정해진 제한된 종류의 색과 함께 구매 후 사용할 수 있었다. 이후 여러가지 색을 조합할 수 있는 믹서 기능이 추가되었고, 확대 기능도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들어갔다. 이 앱은 감압 기능이 있는 터치펜 중에서 포고 플러그를 지원했는데, 일반적인 터치펜 만으로도 이미 이 회사가 추구하는 방향으로는 거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것은 이 회사가 소프트웨어 제작자로 그치지 않고,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Book이었다.
맞다. 보통 명사로 책__이다. 책은 당연히 종이__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고. Paper 내에서 인쇄를 원하는 그림 묶음을 골라서 그 중에 15장을 고르면 그걸 엮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준다. 나도 하나 만들어서 여자친구에게 선물해 줬는데, 바로 우편으로 보내서 아쉽지만 실물을 보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이 회사가 단순한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하드웨어까지 제작하는 — 직접 만드는 것은 아니더라도 — 실제로 Book도 Moleskin과의 협업으로 제작된다 — 회사가 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Book을 제작하기 시작한 다음에는 Pencil이란 것을 만들어서 발표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Paper에 최적화된 터치펜이다. 팜 리젝션 기능이 지원되며 뒷면은 지우개이고, 펜슬을 연결한 채로 손으로 그림을 문지르면 실제로 물감이나 펜을 손으로 문지른 듯한 효과(Blend)가 나타난다. 최근 iOS 업뎃으로 펜촉부분의 굵기가 다른 부분을 이용해서 감압기능 없이 굵기를 다채롭게 조정할 수도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Mix라는 이름의 공유의 공간을 만들기도 했다. 이 곳에는 온전히 내가 그린 그림을 올려서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만든 작품을 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그림을 이용해서 새로운 그림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나는 실력이 워낙 일천하여 믹스에 그림을 올리는 경우는 잘 없지만 다른 사람의 작품과 그 변주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 자주는 아니지만 — 간혹 이것으로 나름대로 그림연습을 하며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사용하는 동안 즐거운 기분을 안겨 주는 프로그램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
FiftyThree는 최근의 업데이트로 페이퍼를 완전히 무료화하였다. 기존에는 인앱구매를 통해 돈을 내고 잠금을 풀거나 펜슬을 구매해서 동기화 해야만 모든 도구를 사용할 수 있었다. 모든 도구를 구매하고, 거기다가 펜슬까지 구매한 입장에서는 상당히 충격적인 발표였지만 이로서 이 회사가 무엇을 꿈꾸고 있는지 겉핥기 정도는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 Platform: 식상한 단어이기도 한데,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고 있고 또 중요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도 한 자리 껴보려고 한다. 믹스는 창작품을 만들고 공유하는 아주 새로운 방식의 네트워크이다. 물론 사진이든 그림이든 내 작품을 공유할 수 있는 공간은 적지 않다. 하지만, Creative Commons 정신에 이토록 충실하게 입각해서, 나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자유롭게 변주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생각한다. (혹시 다른 예가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최근 트위터 피드를 보면 커다란 행사가 있을 때, 전문적인 카투니스트 등을 초빙해서 페이퍼를 통해 그림을 그리고 트위터와 믹스를 통해 공유하도록 하면서 사람들에게 페이퍼의 존재를 알리고 있다.
- 유형의 회사: IT의 발전과 더불어 유형적인 것보다도 무형적인 것의 가치가 엄청나게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그렇기 때문에 유형적인 것의 가치는 여전히 엄청나다. 나만해도 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앱 하나가 10달러가 넘으면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만, 손에 잡히는 무언가를 만원에 산다면 그만큼 고민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는 만질 수 없고 다른 하나는 만질 수 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유형의 무언가를 만들어 낸다는 것은 한 기업의 성장에 있어서도 엄청난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Fiftythree가 소프트웨어 회사를 넘어 실물을 만들어 내기 시작한 것이 이 회사의 성장에도 많은 긍정적인 효과가 있으리라고 믿는다.
결론
모든 종류의 신생 기업들이 이런 성장 방식을 따라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스타트업 회사들의 특성을 생각해 보면 이런 성장방식이 다 맞다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Fiftythree의 성장 전략은 분명 의미가 있을 것이다. 만약 이 회사가 페이퍼라는 기반없이 펜슬을 개발해서 판매하고자 했다면, 그리 좋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 경험으로 펜슬은 분명 잘 만들어진 블루투스 터치펜이지만, 페이퍼 외에서는 기능이 상당히 제약된다. 물론 이 기능에 대한 API를 공개하지 않아서 일 수도 있으나, 페이퍼라는 앱이 없었다면 그러한 기능에 대한 수요조차도 접하기 어려웠으리라고 본다. 바로 얼마전에 53은 세 번 째 모델의 펜슬을 출시했다. 내부에 금 소재를 채택해서 성능이 더 좋아졌다고 한다. 누가 이 제품을 살까? 페이퍼를 이용해 그린 그림을 믹스에 열성적으로 올리는 사람들일 것이다. 왜냐면 다른 앱에서 쓸 수 있는 정도의 기능으로는 펜슬을 구매하는 것은 틀림없는 낭비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처럼 디자인에 꽂혔다면 논외다)
53은 페이퍼라는 앱을 통해서 $80에 달하는 펜슬이라는 블루투스 터치펜을 구매할 다수의 잠재고객을 확보하는 전략을 — 처음부터 의도했던 것은 아닐지라도 — 수립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앱을 유료로 판매했을 뿐 아니라, 간간이 Book을 판매할 수도 있었으니 여러모로 성공적인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